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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007-09-03, Hit : 12175 , IP : 210.125.xxx.xxx

    ------------------역대 하계올림픽 개최지---------------------
    1회 1896년=그리스 아테네
    2회 1900년=프랑스 파리
    3회 1904년=미국 세인트 루이스
    4회 1908년=영국 런던
    5회 1912년=스웨덴 스톡홀름
    6회 1916년=독일 베를린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개최 무산)
    7회 1920년=벨기에 엔트워프
    8회 1924년=프랑스 파리
    9회 1928년=네덜란드 암스텔담
    10회 1932년=미국 로스앤젤레스(LA)
    11회 1936년=독일 베를린
    12회 1940년=핀란드 헬싱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개최 무산)
    13회 1944년=일본 동경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개최 무산)
    14회 1948년=영국 런던
    15회 1952년=핀란드 헬싱키
    16회 1956년=호주(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17회 1960년=이탈리아 로마
    18회 1964년=일본 동경
    19회 1968년=멕시코 멕시코시티
    20회 1972년=독일 뮌헨
    21회 1976년=캐나다 몬트리올
    22회 1980년=러시아(당시소련) 모스크바
    23회 1984년=미국 로스앤젤레스(LA)
    24회 1988년=한국 서울특별시
    25회 1992년=바르셀로나
    26회 1996년=미국 애틀랜타
    27회 2000년=호주(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28회 2004년=그리스 아테네
    29회 2008년=중국 베이징


    -------------아래는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지 입니다.----------------
    1회 프랑스 샤모니(1924)
    2회 스위스 생모리츠(1928)  
    3회 미국 레이크플레시티(1932)
    4회 독일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1936)
    5회 스위스 생모리츠(1948)
    6회 노르웨이 오슬로(1952)
    7회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1956)
    8회 미국 스퀘벨리(1960)
    9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1964)
    10회 프랑스 그레노블(1968)
    11회 일본 삿포로(1972)->유럽,아메리카 대륙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로 개최
    12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1976)
    13회 미국 레이크플레시티(1980)
    14회 유고 사라예보(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1984)
    15회 캐나다 캘거리(1988)
    16회 프랑스 알베르빌(1992)
    17회 노르웨이 릴레함메르(1994)->이 대회 이후로 하계올림픽과 개최 년도가 달라지게됨
    18회 일본 나가노(1998)
    19회 미국 솔트레이크시티(2002)
    20회 이탈리아 토리노(2006)
    ===========================================================================================
    역대 올림픽 개최도시
    -------------------------------------------------------------------------------------------
    그리스인의 제천행사였던 고대올림픽은 그리스가 로마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교도의 종교 행사로 규정·폐지되었다. 이후 1500여년 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올림픽은 프랑스의 피 에르드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세계인의 축제'로 부활하게 되었다. '세계평화의 달성'이라는 이상 아래 부활한 근대대올림픽은 1896년 아테네 대회를 시작으로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세계인의 축제로 새천년 제 27회 시드니대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벌써 올림픽의 역사도 100년을 넘어가고 있다. 2004년 제28회 대회는 다시 아테네에서 개 최될 예정이다. 100여년간의 올림픽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자.


    제28회 아테네 올림픽
    개최년도 : 2004년
    개최지 : 그리스 아테네
    예정일정 : 8월13~28일
    예정 경기종목 : 28개종목 296부문
    예상 규모 :11,000여명
    개최 경력 : 1896년 제 1회 대회 아테네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여 96년 제26회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으나, 미국의 애틀란타에 지고 말았다. 미국의 애틀란타는 올림픽을 최대한으로 이용 막대한 이익을 남기겠다는 주장을 폈고, 경제적 부를 선택한 IOC는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림 픽 대회를 졸속으로 만들게 한 오점을 남겼다.

    제27회
    개최년도 : 2000년
    개최지 : 호주 시드니
    일정 : 9월15일~10월1일
    참가국 : 200개국 (동티모르 포함) 12,000여명
    경기종목 : 28개 종목 300 부문
    한국팀 참가규모 : 22개 종목 139 여명
    개최 경력 : 호주는 1956년 제16회 대회를 멜버른에서 개최

    IOC에 등록된 199개국과 미등록 국가인 동티모르까지 참가해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질 시드 니 올림픽은 전체28개 종목 300개의 금메달을 놓고1만200여명의 선수가 숨가쁜 메달레 이스를 벌이게 된다. 한국은 이번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금메달 4개)에서 전체급 석권을 노리는 것을 비롯해 모두 10∼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5회 연속 올림픽 10 위권 진입을 계획하고 있다.
    제26회
    개최년도 : 1996년
    개최지 : 미국 애틀란타
    일정 : 7월 25일~8월 8일
    참가국 : 197개국 10,700 여명
    경기종목 : 26개종목 271 부문
    한국팀 참가규모 : 26개 종목312명
    개최 경력 : 미국은 23회와 9회 대회를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러시아, 3위 독일, 10위 한국

    근대 올림픽 100주년에 열린 제26회 애틀란타 대회는 사상 최초로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전 회원국이 참석하여 올림픽의 정신을 빛낸 대회였다. 그러나 지나친 상업주의와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폭파사건 등으로 그 성과와 의의가 흐려졌다. 한국은 총 메달수 27개로 10위를 차지해 올림픽대회 4회 연속 10위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제25회
    개최년도 : 1992년
    개최지 : 바르셀로나
    일정 : 7월25일~8월9일
    참가국 : 169개국9,300여 명
    한국팀 참가규모 : 23개 종목 247명
    종합순위 : 1위 독립국가 연합, 2위 미국, 3위 독일, 7위 한국

    바르셀로나 대회는30년 만에 처음으로 경기불참을 선언한 나라 없이 치러진 성공적인 대회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독일팀도 단일 팀으로 출전했고, 구소련은 독립국가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단일 팀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최초로 인종이 통합된 팀을 구성해 다시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는데 마이클 조단, 매직 존슨 등으로 구성된 미국 농구 '드림팀'은 가볍게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인의 환호를 받았다.

    제24회
    개최년도 : 1988년
    개최지 : 서울
    일정 : 9월17일~10월2일
    참가국 : 159개국 8,500여 명
    한국팀 참가규모 : 25개 종목477명
    종합순위 : 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미국, 4위 한국

    서울올림픽은 정치 문제가 다시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대회였다. 북한은 올림픽 공동개최를 계속 주장하며 불참을 선언했고 이에 쿠바, 에티오피아 등의 동맹국들이 동조하며 불참국수를 늘렸다. 이 대회부터 참가 자격을 아마추어로 제한하던 올림픽 규정이 바뀌어 1924년 이후 중단되었던 테니스 경기가 다시 열린 반면 100m 달리기 우승자인 캐나다의 벤 존슨 등 총 10명의 선수가 약물 복용 혐의로 올림픽대회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제23회
    개최년도 : 1984년
    개최지 : 미국 로스엔젤레스
    일정 : 7월28일~8월12일
    참가국 : 140개국 6,800여 명
    개최경력 : 1932년 10회 대회
    한국팀 참가규모 : 21개종목 208명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루마니아, 3위 서독, 10위 한국

    1980년 모스크바 대회 불참을 미국이 주도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동독 등의 공산국들도 불참하여 반쪽짜리 대회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1952년 이래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로스엔젤레스 대회는 지나친 상업주의와 공산권의 불참으로 인한 기록 저조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거액의 흑자와 대대적인 텔레비전 중계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올림픽 운동에 대한 밝은 전망을 갖게 한 대회였다.
    제22회
    개최년도 : 1980년
    개최지 : 소련 모스크바
    일정 : 7월19일~8월3일
    참가국 : 81개국 6천여 명
    한국팀 참가규모 : 한국팀 불참
    마리톤 우승자 : 동독의 체르핀스키 (2시간 11분 3초)
    종합순위 : 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불가리아, 26위 북한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불참 운동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불참 운동을 직접 주도했으며 60여 개국이 동조했다. 또한 몇몇 참가국들은 개막식 뿐 아니라 메달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국가 대신 올림픽 찬가가 연주되는 해프닝을 낳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관중들의 폭동, 조직위원회측의 속임수 등의 사건이 있었으며, 경기 수준 또한 불참국이 많아 저조했다.

    제21회
    개최년도 : 1976년
    개최지 : 캐나다 몬트리올
    일정 : 7월17일~8월1일
    참가국 : 88개국 6,000 명
    한국팀 참가규모 : 5개종목 72명
    마라톤 우승자 : 동독 발데마르 체르핀스키 (2시간 09.55초)
    종합순위 : 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미국, 19위 한국, 21위 북한

    1976년 몬트리올 대회는 올림픽이 정치색으로 얼룩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남겼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비롯한 26개 국가는 뉴질랜드 럭비 팀이 인종 차별이 지속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경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대회 참가를 반대했고, 요구가 거절 당하자 대회에 불참했다. 타이완도 캐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하며 중국이란 국호사용을 불허하자 대회 참가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몬트리올 대회의 꽃은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코마네치는 체조 종목에서 7번이나 10점 만점을 받으며 3개의 금메달을 따내 체조 요정으로 떠올랐다.
    제20회
    개최년도 : 1972년
    개최지 : 독일 뮌헨
    일정 : 8월26일~9월11일
    참가국 : 122개국 8천명
    한국팀 참가규모 : 8개 종목46명 (북한 첫참가)
    종합순위 : 1위 소련, 2위 미국, 3위 동독, 33위 한국

    1972년 뮌헨 대회는 올림픽 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회였다.
    '검은 9월단'인8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선수촌을 습격하여 2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하고 9명의 선수들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감금된 200명의 팔레스타인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였다. 인질 구출작전이 펼쳐졌지만 인질 전원을 비롯해 테러범 5명과 서독 경찰 1명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희생자들의 추모제가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행해졌고 경기는 하루씩 연기되었지만 끝까지 강행되었다.

    제19회
    개최년도 : 1968년
    개최지 : 멕시코 멕시코시티
    일정 : 10월12일~10월27일
    참가국 : 112개국 6,059명 (남자 5,215명, 여자 844명)
    한국팀 참가규모 : 10개 종목55명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소련, 3위 일본, 36위 한국

    멕시코시에서 열린 1968년 올림픽대회는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이래 가장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된 대회였다. 대회 10일 전, 학생들은 멕시코 정부가 국가 재원을 올림픽대회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항의시위를 벌이다 250명이 넘는 사망자와 부상사가 발생했다. 남자 200m 달리기에서는 미국의 흑인선수가 맨발 차림에 한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시상식에 올랐다. 그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찬사와 미국내 소수 민족의 생활 여건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단일팀이었던 독일은 처음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각각 출전했으며, 약물 검사 및 성별 검사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제18회
    개최년도 : 1964년
    개최지 : 일본 동경
    일정 : 10월10일~10월25일
    참가국 : 93개국 5천여 선수
    한국팀 참가규모 : 16 종목165명
    마리톤 우승자 : 이디오피아 아베베 (2시간 12분 11.2초)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소련, 3위 일본, 27위 한국

    1964년 올림픽대회는 컴퓨터로 통계처리를 한 것과 더불어 보다 개선된 시간 기록 및 채점 기술을 선보였다. 19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GANEFO(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에서 타이완(臺彎)과 이스라엘의 참가를 거부한 이후, IOC는 GANEFO 회원국의 올림픽대회 출전권을 박탈해 버렸다. GANEFO는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직된 제3세력의 체육대회였다. 이에 해당한 인도네시아와 북한은 도쿄(東京) 올림픽대회에서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

    제17회
    개최년도 : 1960년
    개최지 : 이탈리아 로마
    일정 : 8월25일~9월11일
    참가국 : 83개국 5천여명
    경기종목 : 17개 종목 150개 부문
    한국팀 참가규모 : 9개 종목 36명
    마라톤 우승자 : 이디오피아 아베베 (2시간 15분 16.2초)
    종합순위 : 1위 소련, 2위 미국, 3위 이탈리아

    1960년 올림픽 대회는 처음으로 대회 내용이 전부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었다. 올림픽대회 경기를 담은 필름은 뉴욕으로 날아갔고, CBS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다. 유러비전은 전유럽에 TV 생방송을 내보냈다. 이디오피아 황제의 근위병이었던 아베베 비킬라는 맨발로 뛰어 마라톤 연속 2연패 역사를 이룰 첫 금메달을 손에 쥐었다.
    제16회
    개최년도 : 1956년
    개최지 :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일정 : 11월2일~12월8일
    참가국 : 67개국 3,184명 (남자 2,813, 여 371명)
    경기종목 : 17개종목 151개부문
    한국팀 참가규모 : 7개 종목 35명
    마리톤 우승자 : 알제리아 앨링 미뭉
    종합순위 : 1위 소련, 2위 미국, 3위 호주, 29위 한국

    1956년은 남반구에서 처음으로 올림픽대회가 열린 해이다. 계절이 북반구와는 반대이기 때문에 대회는 11~12월에 치러졌다. 개최지가 지리적으로 먼데다가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과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으로 참가국 수는 적었다. 동·서독은 처음으로 단일팀으로 출전했으며1964년 대회까지 단일팀으로 참가하였다. 멜버른 대회에서부터 폐막식이 거행되기 시작됐다.

    제15회
    개최년도 : 1952년
    개최지 : 핀란드 헬싱키
    일정 : 7월19일~8월3일
    참가국 : 69개국 4,925명 (남자 4,407명, 여자 518명)
    한국팀 참가규모 : 6개 종목 21명
    마라톤 우승자 : 체코슬로바키아 자토벡 (2시간 23분 03.2초)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소련, 3위 헝가리, 37위 한국

    1952년 헬싱키대회는 냉전의 확산으로 국제적 긴장이 팽팽한 가운데 치러졌다. 소련이 1912년 이후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했으며, 핀란드는 동부 진영 국가들을 위한 올림픽 선수촌을 오타니에미에 따로 마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회 자체는 매우 화기애애했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소련임원단도 그들 숙소를 전 선수들에게 개방했다. 전범 국가인 일본과 독일도 다시 올림픽대회에 참가했지만 동독의 참가가 거절돼 독일은 서독 선수로만 팀을 구성했다.
    제14회
    개최년도 : 1948년
    개최지 : 영국 런던
    일정 : 7월29일~8월14일
    개최경험 : 1904년 제4회 대회
    참가국 : 59개국 (4,400여명)
    경기종목 : 18종목 136개 부문
    한국팀 참가규모 : 한국 최초 참가 7개 종목50명
    마리톤 우승자 : 아르헨티나 카브레라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스웨덴, 3위 프랑스, 24위 한국

    1948년 올림픽 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국가들이 재건에 힘쏟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가 준비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스포츠 제전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패전의 주체인 독일과 일본은 초청장을 받지 못했고, 소련 역시 불참했다. 그러나 헝가리·유고슬라비아·폴란드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은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1948년 올림픽대회는 기억에 남을만한 대회가 되었고, 전쟁으로 억눌린 마음에 위안의 역할을 해주었다.

    제13회
    개최년도 : 1944년
    개최지 : 핀란드 헬싱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열리지 않음

    제12회
    개최년도 : 1940년
    개최지 : 일본 동경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열리지 않음

    제11회
    개최년도 : 1936년
    개최지 : 독일 베를린
    일정 : 8월1일~8월16일
    참가국 : 49개국 4천여명
    경기종목 : 20개종목 148개 부문
    마라톤 우승자 : 한국 손기정 (2시간 29분 19.2초) 일장기 달고 출전.남승용 (3 위)
    종합순위 : 1위 독일, 2위 미국, 3위 헝가리

    1936년 올림픽대회는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2년 뒤 개최되었다. 독일의 민족 차별주의는 올림픽대회 참여 여부에 대한 국제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올림픽대회를 나치 이데올로기의 확산 기회로 이용하여 아리안 혈통의 우월성을 알리는 팜플렛과 연설들이 곳곳에서 난무했으며, 주경기장과 4개의 다른 경기장들은 나치의 깃발과 상징물로 뒤덮으며, 정치적인 올림픽으로 만들어 버렸다. 베를린 대회에서는 최초로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가 육로로 봉송되어 올림픽 기간동안 내내 밝히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제10회
    개최년도 : 1932년
    개최지 : 미국 로스엔젤레스
    일정 : 7월30일~8월14일
    참가국 : 37개국 (1,331명)
    경기종목 : 15개종목 126부문
    마리톤 우승자 : 아르헨티나 칼로스 자발 (2시간 31분 36초)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이탈리아, 3위 프랑스

    1932년 대회는 참가율이 몹시 저조했다, 이것은 당시가 세계적인 불황이었던데다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경비만해도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경기환경이 대폭 향상되었다. 올림픽 선수촌이 선을 보였으며, 경기장은 10만명 이상이 입장할 수 있을 만큼 확장됐고, 으깬 토탄으로 만든 새로운 트랙은 달리기 종목에서 세계신기록이 10개나 쏟아지도록 만들었다. 전자 스톱워치와 사진 판정 카메라가 첫선을 보인 대회이기도 하다.

    제9회
    개최년도 : 1928년
    개최지 : 네덜란드 암스텔담
    일정 : 7월28일~8월21일
    참가국 : 46개국 3,014명 (남자 2,724명, 여자 290명)
    경기종목 : 18종목 125개부문
    마라톤 우승자 : 알제리 엘 우아피 (프랑스 국적으로 출전)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독일, 3위 네덜란드

    1928년 올림픽대회부터 육상과 체조에 여자 경기가 추가되었다. 은퇴한 쿠베르탱과 바티칸 측에서는 여자 육상 경기를 허용한다는 결정에 대해 심한 비난을 가했다. 대회가 시작되자 또다른 논쟁이 일었다. 여자 800m 달리기에서 골인 지점을 앞에 두고 몇몇 여자 선수들이 기진맥진해 쓰러진 것이었다. 올림픽 집행부는 그 거리가 여자 선수에게는 무리라는 데에 합의를 보고 폐지했다. 여자 경기에서 200m 이상되는 경주가 다시 허용된 것은 1960년 로마 올림픽대회부터이다. 암스텔담 대회에서 처음으로 성화가 등장했다.
    제8회
    개최년도 : 1924년
    개최지 : 프랑스 파리
    일정 : 7월5일~7월21일
    참가국 : 44개국 (2,956명)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프랑스, 3위 핀란드

    1924년 대회는 근대 올림픽대회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에서 다시 개최되었고 대회는 경기운영 면에서 높은 역량을 드러냈다. 제8회 대회의 스타는 미국의 수영선수 조니 웨이스물러였다. 그는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수구 경기에도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나중에 그는 영화배우로 데뷔, 타잔역을 맡아 한 번 더 유명해졌다. 1924년 대회 이후 테니스는 많은 선수들이 아마추어 신분 이상으로 출전하는 것이 문제시되어 올림픽대회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테니스는 64년 뒤인 1988년 서울 대회에서 다시 부활되었다.

    제7회
    개최년도 : 1920년
    개최지 : 벨기에 안트워프
    일정 : 8월14일~8월29일
    참가국 : 29개국 (2,543명 여자선수 64명)
    마라톤 우승자 : 핀란드 한네스 콜레마이넨 (2시간 32분 35초 8)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스웨덴, 3위 벨기에

    1920년 올림픽대회 개최권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벨기에에 부흥의 희망을 심어 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안트워프에 돌아갔다. 독일 등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 국가들은 초대받지 못했고 소련도 참가하지 않았다. 육상 경기는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는 1만m 경주와 1만m 크로스컨트리 개인 및 단체 경주에서 그의 개인 통산 금메달 9개 중 3개를 획득했다. 핀란드 팀은 육상 경기에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미국보다 1개가 적은 9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역사적 기록을 세웠다. 이 대회에서 올림픽 기(오륜기)가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제6회
    개최년도 : 1916년
    개최지 : 독일 베를린 (세계 제1차 대전으로 열리지 않음)


    제5회
    개최년도 : 1912년
    개최지 : 스웨덴 스톡홀름
    일정 : 6월29일~7월22일
    참가국 : 28개국 (2,490명 여자선수 57명)
    종합순위 : 1위 스웨덴, 2위 미국, 3위 영국

    '스웨덴의 걸작'이라 불린 1912년 올림픽대회는 그 당시 가장 조직적이고 능률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평가받았다. 스톡홀름 대회가 낳은 스타는 미국의 짐 소프이다. 그는 근대5종경기와 10종경기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난 다음해 그가 직업선수였다는 과거 행적이 발각되어 실격되어 금메달은 2위 선수에게 돌아갔다.
    제4회
    개최년도 : 1908년
    개최지 : 영국 런던
    일정 : 7월13일~10월31일
    참가국 : 22개국 (2063명 여자 36명)
    마리톤 우승자 : 미국 헤이즈 (2시간 55분 18초 4)
    종합순위 : 1위 영국, 2위 미국, 3위 스웨덴

    1908년 대회는 원래 로마에서 거행될 계획이었으나, 1906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런던 대회는 올림픽 대회의 규칙을 점검하고, 마련하는 등 올림픽 부활 이후 대회가 체계를 잡기 시작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육상 경기는 미국 선수들과 영국 운영진들 사이에 갈등이 두드러졌다. 미국의 존 카펜터가 우승한 400m 결승전은 무효 처리되었는데 이유는 카펜터가 영국선수의 주로를 방해했다는 것이었다. 재경기가 벌어졌지만 미국 선수들은 출전을 거부했고, 헬스웰은 대회 역사상 유일하게 혼자 달려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되었다. 마라톤 경기도 또다른 논란거리였다. 이탈리아의 도란도 피에트리가 코스를 모두 달리고 경기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압도적인 선두였으나 결승점을 불과 몇백m 남겨 놓고 실신하고 말았던 것이다. 경기 운영진의 도움을 받으며 결승점을 통과했는데 이에 대해 미국측에서 크게 반발했고, 피에트리는 결국 실격 처리되었다.

    제3회
    개최년도 : 1904년
    개최지 : 미국 세인트 루이스
    일정 : 7월1일~11월23일
    참가국 : 12개국 (681명)
    마라톤 우승자 : 토마스 힉스 (3시간 28분 53초)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쿠바, 3위 독일

    1904년의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대회는 1900년 파리 올림픽대회와 같은 상황이었다. 원래 이 대회는 시카고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루이지애나 상업박람회와 함께 세인트루이스에서 거행되었다. 몇몇 경기는 인류학적 전시 차원에서 열렸는데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피그미족이 참여하여 진흙탕에서 싸우거나 장대오르기 등의 경쟁을 펼쳤다. 따라서 경기에 실제로 선수들이 참여한 경우는 적었다. 더욱이 세인트루이스가 당시에는 오지였고 러시아와 일본간의 전쟁 위험이 고조되면서 많은 선수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근대 올림픽대회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제2회
    개최년도 : 1900년
    개최지 : 프랑스 파리
    일정 : 5월14일~7월24일
    참가국 : 19개국 (1,066명)
    최초의 여자 올림픽 챔피언 : 영국 샤로트 구퍼 (테니스 단식)
    마리톤 우승자 : 프랑스 빵집 배달원 데아토 (2시간 59분 45초)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프랑스 3위 영국

    2번째 근대 올림픽대회는 같은 해 파리에서 열렸던 세계박람회의 일부로 전락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올림픽대회의 운영권을 프랑스 정부에 빼앗기면서 조직과 경영면에서 매우 부실한 모습을 보였고, 경기는 5개월이 넘도록 지속되었다고 한다. 경기장 시설도 미비한 점이 많아 부러진 전신주를 허들 대신 이용하기도 했다. 마라톤의 우승자는 프랑스의 빵집 배달원이었는데 미국선수가 자신이 우승자를 따라 잡으려는 순간 자전거에 치어 넘어졌다면서 경기 무효를 주장하며 소송까지 벌여 12년 동안 자신이 우승자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결국 승소하지는 못했는데 파리대회의 운영이 얼마나 엉망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제1회
    개최년도 : 1896년
    개최지 : 그리스 아테네
    일정 : 4월6일~4월15일
    참가국 : 13개국(그리스,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헝가리, 오스트리아, 호주, 덴마크, 스위스 등 311명)
    경기종목 : 43개 종목
    마라톤 우승자 : 그리스 목동 스피로스 루이스 (2시간 58분 50초)
    종합순위 : 1위 미국 2위 그리스 3위 독일

    근대 올림픽대회의 첫번째 경기는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도시는 온통 퍼레이드와 연회로 뒤덮였으며 축제 분위기였다. 경기는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896년 올림픽대회에서는 첫번째 마라톤대회가 거행되었다. BC 490년 적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페이디피데스가 달렸던 그 길을 선수들이 다시 달리는 것이었다. 마라톤 경주는 올림픽대회의 하이라이트였다. 이 대회에서는 그리스의 목 동 스피로스 루이스가 우승했는데 그는 이 우승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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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아테네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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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아테네올림픽은 28회이구요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서울88올림픽은 24회입니다.
    지금까지 열린 하계.동계 올림픽 연대는........

    (1) 제 1 회 대회(1896, 아테네)

    회기 그리스력 4월 6일(태양력 3월 25일)∼15일. 참가국 13, 선수수 295. 그리스 국민은 1896년에 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개최한다는 쿠베르탱 등의 결정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파산상태에 가까운 재정 등을 고려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 쿠베르탱은 콘스탄틴황태자(1960년 로마대회 요트 부문의 우승자 콘스탄틴황태자의 조부)를 통해 게오르그 국왕을 설득하여 개최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황태자를 장(長)으로 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자금 등의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그리스인 부호 아베로프가 92만 드라크마를 기부하여 주경기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주경기장은 고대 경기장터에 대리석으로 건조된 5만 명 수용 규모의 호화로운 경기장으로, 주로(走路)는 현재와 반대인 오른쪽으로 도는, 급커브이기는 하지만 한 바퀴가 400m인 훌륭한 것이었다. 실내경기는 루마니아에 살던 자파스형제가 1887년에 기증한 실내체육관 자페이온에서 거행되었다. 개회식에는 회장 안팍에 8만 명이 몰려들었고 국왕의 개회선언이 있은 뒤 C. 팔라마스 작사, S. 사라마스 작곡의 <올림픽의 노래>가 불렸다. 경기는 육상경기·체조·역도·펜싱·조정·수영·사이클·레슬링·테니스·사격의 10경기, 43종목이라고 발표되었다. 그 밖에 예정되었던 수구·마술·크리켓은 취소되었고 조정도 악천후로 중지되었다. 이러한 경기종목의 내용에 관해서는 고대 그리스보다 오히려 쿠베르탱이 열심히 연구한 영국 스포츠의 영향이 컸다. 이 대회에서는 우승자와 2위인 사람만이 상을 받았는데, 우승자에게는 상장·은메달·올리브관, 2위자에게는 상장·청동메달·월계관을 수여하였다. 그리스인이 전통적 경기로 믿던 원반던지기를 비롯하여 수(水)·육(陸) 경기의 우승을 미국인과 그 밖의 외국인이 차지하였으므로 그들의 낙담은 컸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기리며 추가된 마라톤(프랑스인이며 프랑스 학사원의 브레알이 제안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처럼 장거리의 경주는 없었다)에서 그리스의 양치기 S. 루이스가 역주하여 우승함으로써 그리스 전국을 열광시켰다. 아테네는 근대 올림픽의 출발을 멋지게 장식했던 것이다. 우승수 ① 미국 11 ② 그리스 10 ③ 독일 7.

    (2) 제 2 회 대회(1900, 파리)

    회기 7월 2일∼10월 28일. 참가국 20, 선수수 1107. 이해에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와 공동주최로 개최한다는 것이 쿠베르탱의 의향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육상협회와의 반목, 박람회 당국의 몰이해, 올림픽 지식의 결여 등으로 혼란에서 시작되어 혼란으로 끝난 대회였다. IOC는 운영비가 모자라서 마지막에는 불로뉴숲의 프랑스레이싱 클럽의 그래스 코트를 빌려 육상경기만 치렀을 정도였다. 다른 경기는 세계박람회의 부속경기회 명목으로 15프랑부터 최고 4000프랑까지의 상금이 걸렸다. 경기기록에도 불명확한 점이 있고 올림픽대회의 진의에도 어긋나는 부진한 대회였다. 영국의 S. 쿠퍼가 여자테니스의 단식에서 올림픽 사상 최초의 여성 우승자가 되었다. 또 이 대회부터 초대 회장인 D. 비켈라스(그리스)를 대신하여 쿠베르탱이 IOC 제 2 대회장이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19 ② 프랑스 13 ③ 영국 11. 그러나 이 숫자는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3) 제 3 회 대회(1904, 세인트루이스)

    회기 7월 1일∼10월 15일. 개회식은 육상경기 개시일인 8월 29일에 있었다. 참가국 10, 선수수 532. 제 2 회 대회에서 크게 활약한 미국에 보답하기 위하여 대회는 대서양을 건넜다.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가 유치를 다투었는데, 신임 대통령인 T. 루스벨트의 결정으로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다. 프랑스는 파견비를 조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전대회(파리대회)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도 루이지애나 구입 100주년기념 박람회의 여흥적 경기대회로 치러졌으며, F. 체펠린의 비행선과 무선전신이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때마침 열렸던 미국 육상경기 선수권대회에 관심이 집중되어 쓸쓸한 대회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앞선 스포츠 시설과 용구는 유럽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경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었다. 한편, 마라톤에서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로츠가 스타디움에 유유히 도착하여 환호성 속에 골인하고 우승자로 발표된 뒤 대통령 딸과 기념촬영까지 했으나 실은 로츠가 5㎞ 지점에서 더위로 낙오하여 옆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에 수용되어 원기를 회복한 후 고장으로 자동차가 정지해 있는 사이에 다시 달려 우승했다는 것이 판명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우승자인 힉스에게 금메달이 수여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 오는 <부정승차 마라톤>으로 유명한 일화이다. 대회장은 주로 워싱턴대학을 사용했으며, 다이빙은 독일 선수의 지도로 미시시피강을 사용하였다. 대학의 동쪽에 접해 있는 프레스트공원이 박람회장이었고, 그곳에는 급조한 호텔이 있었다. 일부의 경기참여자도 숙박하였으므로 올림픽촌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 우승수 ① 미국 70 ② 쿠바 5 ③ 독일 4.


    4 아테네 국제경기대회(1906)
    제 2 차세계대전전까지는 올림픽 중간대회라고 불렸던 것으로, 전쟁 후에는 정식대회에서 제외되고 있다. 제 1 회 대회 후, 그 뒤의 대회도 그리스에서 개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열광적인 분위기 때문에 쿠베르탱은 다음 대회의 개최지를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론의 완화책으로서 4년마다 중간년에 아테네에서 특별대회를 개최한다는 약속을 그리스 황태자와 맺고 그 뜻을 받들어 열린 것이다. 앞 회의 대회가 거리가 먼 미국이었기 때문에 불참했던 많은 유럽국가들이 대거 참가함으로써 훌륭한 대회가 되었다. 참가국 22, 선수수 883.

    (1) 제 4 회 대회(1908, 런던)

    회기 5월 6일∼10월 29일. 참가국 22, 선수수 2034. 이 대회도 영국-프랑스박람회와 동시에 개최되었으나, 박람회측으로부터는 자금만 빌렸을 뿐이었다. 더욱이 근대 스포츠 발상지의 명예를 지닌 영국은 경기운영을 관계 경기단체에 맡겨 진행하여 경기 규칙도 상당히 정비되었고, 다음 대회인 스톡흘름대회와 더불어 이후의 대회 운영의 기초를 만든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유롭던 참가 신청 방식을 폐지하고, 각국 각 경기의 국내 통괄단체인 NOC를 조직하고 이를 통한 신청만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개회식에는 각국의 국기를 선두로 입장행진이 있었다. 한편, 처음으로 대회조직위원회(Olympic Organizing Committee, OOC)가 대회 운영을 위하여 조직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양대 스포츠국인 영국과 미국이 독립전쟁 이래 감정적 알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아마추어 자격문제, 경기규칙 문제 등으로 많은 대립이 일어났다. 이것을 지켜본 세인트 폴 성당의 펜실베이니아주교가 일요 미사에 모인 각국 선수에게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라고 설교했는데, 이 말에 감동한 쿠베르탱은 후에 이 말을 올림픽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올림픽의 모토인 <보다 빠르게 Citius, 보다 높게 Altius, 보다 힘차게 Fortius>는 도미니크 교단 소속 H.M. 디동 신부가 제안한 것으로, 쿠베르탱이 1897년부터 채용하였는데, IOC에서 공인받은 것은 1926년의 일이었다. 또한 마라톤은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42.195㎞ 코스를 달렸는데, 또다시 <도란도의 비극>이라고 불린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장에 도착한 이탈리아의 P. 도란도가 쓰러져 임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골인하였는데, 이것이 반칙이 되어 우승이 취소되었다. 영국의 알렉산드라 황후가 이를 동정하여 그에게 금컵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마라톤 거리가 제 8 회 이후 정규 거리가 되었다. 동계 경기에 피겨 스케이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하나의 화제이다. 우승수 ① 영국 56 ② 미국 23 ③ 스웨덴 7.

    (2) 제5회 대회(1912, 스톡홀름)

    회기 5월 5일∼7월 23일. 참가국 28, 선수수 2504. IOC와 협력해오던 스웨덴 왕실이 앞장섰고, 주경기장 신설 등에도 정부와 시의 협력이 있었으며, 육상경기에서는 전기시계에 의한 기록 계측과 결승의 사진판정기 채용 등 올림픽 운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대회에 이어 유럽의 황제·왕실·귀족들로부터 각종 상품도 수여되었다. 이 대회부터 육상경기에 5종과 10종의 혼성경기, 근대 5 종경기와 마술, 여자 종목으로서의 수영, 고대 올림피아제를 본떠 예술경기가 추가되었다. 복싱은 스웨덴의 국내법에 따른 금지 규정으로 거행되지 않았다. 장거리 육상경기에서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의 코레마이넨이 5000m경주·1만m 경주·8000m 크로스컨트리의 3종목에 우승하여 주목을 끌었다. 수영에서는 하와이출신의 카하나모크가 크롤 스트로크(자유형)를 소개하면서 100m에 우승하였고, 아메리칸 인디언 J. 소프가 혼성경기 중 2종목에서 우승하는 등 유색인종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도 이 대회부터였다. 그러나 소프는 그 전에 야구에서 프로선수로 활약하였다고 인정되어 다음해인 1913년의 IOC 총회에서 아마추어 자격의 박탈, 금메달의 반환을 명령받았다. 메달반환의 제 1 호였는데, 1982년 10월에 그의 자매와 당시의 G.R. 포드 미국대통령의 복권운동이 결실을 맺어 실격이 취소되었다. 우승수 ① 스웨덴 24 ② 미국 24 ③ 영국 10.

    (3) 제6회 대회(1916, 베를린)

    1914년 6월 13일부터 파리에서 IOC 창설 20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쿠베르탱은 <올림픽기>를 고안하였으나 그해 6월 28일에 사라예보사건이 돌발하자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베를린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15년 IOC는 스위스의 로잔으로 옮겨져 항구적인 본부가 설치되었다.

    (4) 제 7 회 대회(1920, 안트베르펜)

    회기 4월 23일∼9월 29일. 참가국 29, 선수수 2591. 전쟁의 상처를 입어 황폐해진 벨기에의 청년들에게 마음의 양식으로 보내진 대회였다. 준비기간은 짧았지만, 뒤에 IOC 회장이 된 B. 라투르를 조직위원장으로 하여 3만 명 수용의 주경기장과 늪을 구획한 풀의 축조, 앙투카 코트를 채용한 테니스코트 등 최대의 노력이 기울여졌다. 전쟁 책임을 묻는 의미에서 독일·오스트리아·불가리아·터키의 참가는 허용되지 않았고 제 1 차세계대전의 결과 독립한 발트 3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참가하였다. 핀란드도 완전한 독립국으로서는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메인폴에는 새로 창안된 올림픽기가 나부꼈고, 고대 올림피아제와 같이 선수선서도 있었으며, 이후 선수선서는 세계적 유행이 되었다.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날아다니는 핀란드인>이라는 말을 들은 P. 누르미가 1만m경주·1만m크로스컨트리에서 우승하고, 제 5 회 대회의 우승자 코레마이넨이 마라톤을 제패한 일이다. 우승수 ① 미국 41 ② 스웨덴 17 ③ 핀란드 14.

    (5) 제 8 회 대회(1924, 파리)

    회기 3월 15일∼7월 27일. 참가국 44, 선수수 3075, 파리 교외 콜롱브의 신설 경기장에는 처음으로 마이크로폰이 설비되었고, 근처에 올림픽촌이 가설되었다. 1호에 4인 수용인 목조 판자집이었지만, 소수 팀에는 편리한 시설이었다. 대회에 앞서서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 남프랑스의 샤모니 몽블랑에서 이 대회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계대회가 개최되었고, 나중에 공인되어 제 1 회 동계대회가 되었다. 경기는 어느것이나 열기를 띠어 축구에서는 우루과이, 폴로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유럽팀을 격파하는 등 예기치 않은 나라의 활약이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각 경기의 왕좌는 여전히 미국이 확보하였다. 기록할 만한 것은 핀란드의 누르미로 선수가 1500m에서 우승한 지 30분 만에 5000m에 출장하여 우승해서 대회의 꽃이 되었고, 가히 초인적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훗날 영화배우가 되어 타잔역으로 이름을 날린 J. 와이즈뮬러가 수영에서 활약했던 것도 이 대회 때였다. 이 대회부터 마라톤의 거리가 42.195㎞로 결정되었고, 테니스가 올림픽 종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해인 1925년, IOC는 올림픽헌장을 정식으로 공포하고, 이를 계기로 쿠베르탱은 은퇴하여 종신 명예회장이 되고 벨기에의 라투르가 제 3 대 회장이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45 ② 프랑스 14, 핀란드 14.

    (6) 제 9 회 대회(1928, 암스테르담)

    회기 5월 17일∼8월 17일. 참가국 46, 선수수 2971. 개최국 네덜란드는 준비 도중에 올림픽이 비그리스도교적이라는 반대 의견으로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자금난으로 한때 개최가 위태로웠으나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 거주의 네덜란드인의 원조를 계기로 시설이 완비되었다. 주경기장은 앙투카 트랙으로 포장되었지만, 대회기간 동안 다우저온(多雨低溫)으로 애를 먹었으며, 개회식에 맞추어 급조한 것이어서 빈약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16년 만에 패전국인 독일·오스트리아 등이 참가하고, 육상경기에서 처음으로 여자경기도 있었다. 주경기장에 세운 마라톤탑에는 회기중 올림픽 성화가 계속 타올랐다. 이 대회부터 개회식 행진의 선두에 그리스가 서게 되었다. 인도가 하키에서 처음으로 우승(제16회 대회까지 연속 우승하게 된다)하였고, 축구에서는 우루과이가 전회에 이어 연속 우승하였다. 우승수 ① 미국 22 ② 독일 11 ③ 프랑스 7.

    (7) 제10회 대회(1932, 로스앤젤레스)

    개회식 7월 30일∼폐회식 8월 14일. 참가국 38, 선수수 1331. 개최가 결정되고 9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대회 3년 전에 완성되었던 올림픽 공원을 비롯하여 10만 5000명 수용의 대경기장(1984년의 제23회 대회도 이곳이 주경기장임), 수영장 및 미술관·오디토리엄 등의 부속 시설이 사상 최대의 것이었으며, 민간의 손으로 호화로운 대회를 운영한 첫 대회라고 할 수 있다. 또 코티지풍의 올림픽촌은 남자임원·선수를 전원 숙박시킬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드는 자금 때문에 유럽의 참가국이 적었다. 이 대회는 한국인이 처음으로 참가(남자선수 3명이 육상과 복싱에 참가)한 대회였다. 비록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지만 한국인의 올림픽대회 첫 참가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우승수 ① 미국 44 ② 이탈리아 12 ③ 프랑스 11.

    (8) 제11회 대회(1936, 베를린)

    개회식 8월 1일∼폐회식 8월 16일. 참가국 49, 선수수 3980. 나치스 총통 A. 히틀러가 국위 선양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이 대회는 올림픽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면에서 군대의 강력한 협조가 있었고, 제10회 대회를 능가하는 호화롭고 웅장한 설비를 갖춘 대제전이 되었다. 반면, 나치당기(旗)인 하켄크로이츠를 처음으로 독일 국기로 사용하였고, 회장 내외에 넘쳐 흐르게 하는 등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고대 그리스를 회상하듯이 우승자에게는 금메달 이외에 올리브와 떡갈나무의 묘목을 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성화봉송이 있었다. 그리스의 신전 유적에서 태양광선으로 채화된 성화가 청년들에 의해서 회장인 베를린까지 릴레이되었다. 성화봉송이 이 대회에서는 독일군 참모본부의 군사용 조사에 악용되었다고 하지만, 올림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의식이 되었다. 경기 내용도 충실하여 세계 올림픽 신기록이 150개 이상이 나와, <세계기록의 대회>라고 불렸다. 많은 올림픽의 영웅이 나왔는데, 단거리·허들·멀리뛰기에 3개의 세계기록을 세우며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J. 오언스가 대표적인 선수였다. 경비를 아끼지 않고 제작한 리펜슈탈여사의 《민족의 제전》과 《미(美)의 제전》은 사상 최고의 올림픽 기록영화로 꼽힌다. 이 대회에도 한국인 남자선수가 육상·복싱·농구·축구에 7명 참가하였는데, 육상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금메달, 남승룡(南昇龍)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937년 쿠베르탱이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 우승수 ① 독일 38 ② 미국 24 ③ 헝가리 10.

    (9) 제12회 대회(1940, 도쿄·헬싱키)

    도쿄[東京] 대회는 1938년 7월 15일, 중·일전쟁을 이유로 일본 각의에서 반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헬싱키로 변경되었으나 제 2 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열리지 못했다. 동계대회도 일본 삿포로[札幌]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중지되었다. IOC 회장 라투르가 42년에 죽고, 스톡홀름대회에서 운영에 힘쓴 J.S. 에드스트룀이 부회장 자격으로 실권을 쥐었으며, 46년 정식으로 제 4 대 IOC회장이 되었다.

    (10) 제13회 대회(1944, 런던)

    제 2 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11) 제14회 대회(1948, 런던)

    개회식 7월 29일∼폐회식 8월 14일. 참가국 58, 선수수 4062. 독일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런던의 대회 개최는 운영이나 설비 면에서 어려움이 컸지만, 각국의 협력과 신흥국의 참가로 제11회 베를린 대회보다 훨씬 많은 선수가 모였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은 참가하지 못했으며, 일찍 항복했던 이탈리아는 참가하였다. 또 성화봉송은 나치스의 모방이라 하여 반대하는 등 올림픽 무용론까지 나왔으나,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논의는 어느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기 내용은 저조하였지만 화제가 된 사람은 네덜란드의 쿤과 체코슬로바키아의 C.E. 자토펙이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쿤이 100m경주·200m경주·80m허들의 3종목에 우승하였고, 400m릴레이의 앵커(마지막 주자)로도 뛰어 세 사람을 앞질러 골인함으로써 4개의 금메달을 땄다. 자토펙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달려 1만m에서 우승하였고, 5000m에서는 은메달을 따 주목을 받았다. 1947년에 IOC에 가입한 한국은 이 대회부터 태극기를 앞세우고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임원 17명과 복싱·역도·육상·농구·축구·사이클·레슬링에 남자 49명, 여자 1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복싱에서 동메달 1개, 역도에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1951년의 IOC 총회에서 소련의 NOC가 승인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38 ② 스웨덴 17 ③ 핀란드 10.

    (12) 제15회 대회(1952, 헬싱키)

    개회식 7월 14일∼폐회식 8월 3일. 참가국 69, 선수수 5867. 핀란드는 북유럽의 작은 국가인데다가 소련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카렐리야지방 등을 잃고, 배상금을 물면서도 10여 년 전부터의 열망이 결실을 이루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설, 진실한 국민성 등이 조화를 이루어 잘 조직된 대회를 개최하였다. 독일과 일본도 다시 대회의 초청을 받았고, 이 대회부터 소련이 혁명 이래 처음으로 참가하였는데, 체조를 비롯하여 우수한 경기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좋은 적수가 되었다. 대망의 올림픽을 개최한 핀란드가 경기에서 왕년의 명예를 잃었던 것은 패전국의 비극일 것이다. 또 IOC에 가입하지 않았던 중국은 단 1명의 선수만 수영에 출장할 것을 허용받았다. 중국은 다음해인 53년에 IOC에 가입하였으나, 57년에 탈퇴하였다. 올림픽의 영웅 누르미가, 성화봉송의 최종 주자가 되어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경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토펙이 5000m·1만m·마라톤에서 우승함으로써 <인간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은 임원 20명과 남자선수 20명, 여자선수 1명이 복싱·역도·사이클·승마·레슬링 종목에 참가하여, 복싱과 역도에서 각각 1개씩의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예술경기는 이 대회부터 예술전시로 바뀌어 우열을 다투지 않게 되었다. 또 이해부터 A. 브런디지가 제 5 대 IOC 회장이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40 ② 소련 22 ③ 헝가리 16.

    (13) 제16회 대회(1956, 멜버른, 승마는 스톡홀름)

    개회식 11월 22일∼폐회식 12월 6일. 참가국 67, 선수수 3342. 남반구에서의 첫 대회로, IOC는 이때의 결정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법률에서는 말의 국내 유입·수입에 6개월의 검역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승마경기는 29개국이 참가, 6월 10∼17일 스톡홀름에서 열림으로써 1도시 개최를 규정한 헌장에 위반되는 변칙적인 대회가 되어버렸다. 멜버른의 준비도 한때 포기할 단계에 왔다고 생각될 만큼 진척되지 않았으며, 대회가 시작되고도 통신관계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여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대회 직전 수에즈와 헝가리에 동란이 일어나서, 대회 출장중이던 헝가리 선수의 미국망명 사건과, 수구 경기에서는 헝가리·소련 경기에서 난투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는 소련과 미국의 각축전으로 시종되었지만, 수영에서 개최국인 오스트레일리아가 남녀 13종목중 8종목에 우승함으로써 남반구 스포츠계에 좋은 자극이 되었다. 이 대회에 한국은 임원 22명과 선수 35명(전원 남자)이 참가, 복싱·역도·레슬링·육상·사이클·사격·농구에 출전하여, 복싱에서 은메달 1개, 역도에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스톡홀름에서의 승마경기는 유럽왕실을 한자리에 모아 중세 기사도시대를 재현한 듯한 대회가 되었다(승마만의 우승수 ① 스웨덴 3 ② 독일 2 ③ 영국 1). 우승수 ① 소련 37 ② 미국 32 ③ 오스트레일리아 13.

    (14) 제 17회 대회(1960, 로마)

    개회식 8월 25일∼폐회식 9월 11일. 참가국 84, 선수수 5396. 로마는 올림픽이 시작된 뒤로 제 4 회 대회에도 개최 신청을 하였지만 국내 사정으로 사퇴하였고, 제12회 대회는 도쿄[東京]에 양보하는 등 헬레니즘세계의 중심도시로서는 불운한 입장에 있었다. 바라던 기회가 왔으므로 로마는 시설에 힘을 기울였다. 경기장은 제 2 차세계대전 전에 B. 무솔리니가 구상했던 대로 신구 시가로 분산하여, 고대 로마의 유적인 카라칼라욕장·로마시장 등을 이용하고, 대리석을 많이 쓴 주경기장과 근대식 원형체육관 등을 신설하였다. 성화는 일찍이 J. 카이사르가 개선한 포석도로 아피아가도를 달렸고, 마라톤코스는 캄피돌리오언덕에 있는 시청사 앞에서 아피아가도를 달려 콘스탄티누스황제 개선문을 결승점으로 하는 등, 역사적 무대장치에 아쉬운 것이 없었다. 이 대회에서 수영을 먼저 하고 육상을 뒤로 돌리는 프로그램의 교환이 있었는데, 이것은 대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육상경기로 막바지의 분위기를 고조해 보려는 개최도시의 발상이었다. 마라톤에서는 에티오피아의 무명 신인 B. 아베베가 맨발로 아피아가도를 역주하여 신기록으로 우승함으로써 지난날의 종주국 이탈리아와 식민지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관계를 역전시켰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스포츠계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한국은 임원 40명에 선수는 36명(남자 34, 여자 2)이 육상·복싱·역도·레슬링·사격·사이클·체조·수영·승마에 출전하였으나 메달은 하나도 획득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었다. 우승수 ① 소련 43 ② 미국 34 ③ 이탈리아 13.

    (15) 제18회 대회(1964, 도쿄)

    개회식 10월 10일∼폐회식 10월 24일. 참가국 94, 선수수 5586. 제12회 대회를 반납한 도쿄는 제17회 대회 개최를 신청했으나 실패, 1959년 뮌헨에서 열린 제55회 IOC 총회에서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대회가 되었다. 많은 비용을 들인 각 시설은 훌륭하여 IOC와 각국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경기의 운영도 과학시설이나 종전의 용구를 개량하여 채용하였으며, 경기의 진행이나 심판의 정확성 등이 높이 평가되었다. 경기종목은 배구와 유도가 더해져 20개가 되었다. 참가국 중 유색인종의 참가국이 52개국인데, 새로 참가하는 16개국은 이해에 독립한 탄자니아를 포함하여 모두 유색인종이었다. 또 북한과 인도네시아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와 있었으나, 신흥국국제경기대회(GANEFO;가네포)에서 국제경기연맹으로부터 출장정지를 당한 선수가 있었으므로 양국은 개회식 전에 귀국하였다. 북한의 육상선수 신금단(辛金丹) 선수가 한국에서 온 아버지와 잠시 눈물의 재회를 한 것도 이때였다. 경기 내용도 충실하여 세계신기록 47, 올림픽신기록 111개가 나왔다. 특히 수영에서 10대 선수가 크게 활약한 것이 특징이다. 에티오피아의 아베베가 마라톤을 2연패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돈 프레저가 여자수영 100m 자유형에서 올림픽 3연패를 하였으며, 여자체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슬라프스카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은 임원 59명, 선수 156명(남자 130, 여자 26)이 레슬링·복싱·유도·마라톤·배구·승마·수영·사이클·체조·육상·펜싱·역도·근대 5 종·축구·사격·농구에 참가하여, 레슬링과 복싱에서 은메달을 각각 1개씩, 유도에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우승수 ① 미국 36 ② 소련 39 ③ 일본 16.

    (16) 제 19회 대회(1968, 멕시코시티)

    개회식 10월 12일∼폐회식 10월 27일. 참가국 113, 선수수 6629. 멕시코시티는 해발고도 2240m의 고지이므로 많은 스포츠관계 의사들로부터 대회장소로서 부적합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IOC는 강화합숙 제한일수를 2주간 연기하여 6주간으로 연장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육상경기에서는 20명, 수영에서는 15명이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세계타이기록 19, 올림픽신기록 114개가 수립되는 등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왔다. 특히 멀리뛰기의 비몬이 8m 90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움으로써 고지의 희박한 대기와의 관계가 논의되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올림픽촌이 있었고 주경기장은 최초의 전천후 트랙이었으며, 기존의 아스테카축구장은 10만 명을 수용하였다. 대회 직전에는 국제학생운동에서 불이 붙은 격렬한 학생운동과 이에 대한 군대의 가혹한 탄압이 있었다. 시내에는 총탄의 자국이 남아 있었고, 삼엄한 경계가 있었으나 대회의 운영에는 지장이 없었다. 또 이 대회에는 인종차별문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초대되지 않았다. 북한 등의 정식국명 호칭문제로 IOC 총회에서 격론이 있었고, 육상경기의 표창식에서는 미국 흑인 입상자 2명이 흑인차별에 항의하는 뜻을 나타냄으로써 올림픽촌에서 추방되었다. 또 하계대회에서 성화봉송의 최종 주자가 현역여자선수였던 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편, 경기에서는 아프리카국가들이 눈부신 활약을 하여 케냐·에티오피아·튀니지·우간다·카메룬의 선수들이 16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지난 대회에 이어 체조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딴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슬라프스카의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임원 21명과 55명의 선수(남자 41, 여자 14)가 복싱·육상·배구·레슬링·역도·사이클·체조·수영·사격·농구에 참가하여 복싱에서만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우승수 ① 미국 45 ② 소련 29 ③ 일본 11.

    (17) 제20회 대회(1972, 뮌헨)

    개회식 9월 26일∼폐회식 10월 11일. 참가국 122, 선수수 7894. 나치스 치하의 제 11회 베를린대회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평화와 자유를 강조하는 대회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10월 5일 이른 아침, 올림픽촌의 이스라엘 숙사에서 <검은 9월단>이라고 칭하는 게릴라 조직이 테러를 자행하여 11명의 이스라엘 대표단원이 희생되었다. 올림픽사상 최대의 참극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대회를 속행할 것인가 중지할 것인가가 논의되었는데, 1일의 애도일을 두고 경기는 재개되어 예정보다 하루 늦은 11일에 폐회되었다. 마침내 올림픽을 둘러싸고 정치·인종·종교의 대립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경기에서 동독·서독 양국의 건투가 눈에 띄었고, 미국은 지금까지 무패였던 농구와 장대높이뛰기의 우승을 빼앗겼으나, M. 스피츠가 수영 13종목에 참가하여 금메달과 세계신기록 7개를 획득하였다. <바르디>라는 애칭의 닥스훈트가 올림픽의 마스코트로서 처음 등장하였다. 한국은 19명의 임원과 47명의 선수(남자 35, 여자 12)가 유도·육상·복싱·레슬링·배구·역도·수영·사격에 참가하여 유도에서 은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그때까지 IOC 규약에 규정되어 조직위원회의 권한이던 2종목의 전시경기는 1973년의 규약개정으로 삭제되었다. 다만, IOC와는 관계없이 개최도시의 판단으로 전시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올림픽과 무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50 ② 미국 33 ③ 동독 20.

    (18) 제21회 대회(1976년, 몬트리올)

    개회식 7월 17일∼폐회식 8월 1일. 참가국 88, 선수수 6189. 제 1 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예산이 당초보다 4배나 폭등하고 정치적 문제도 얽혀 몇번이나 중지를 고려하면서도 개최되었다. 뮌헨대회의 교훈으로 경비(警備)는 올림픽사상 최대규모였다. 개최 직전에 중화민국(타이완)·남아프리카공화국 문제로 혼란상태에 빠져 또다시 올림픽에 정치문제가 나오는 결과를 낳았다. 성화는 시대를 반영하여 그리스로부터 위성중계에 의한 레이저광선으로 오타와에서 점화되어 그곳으로부터 몬트리올의 대회장으로 봉송되었다. 육상경기에는 카리브 선풍이 불었고, 또 소련의 사네예프가 세단뛰기에서 올림픽 3연패를 이룩하는 등 미국의 독무대에서 메달의 분산 시대로 옮겨가는 감이 들었다. 여자체조에서는 하얀 요정인 14세의 코마네치(루마니아)가 10점 만점을 7번이나 받아 화제에 올랐으며, 여자 수영에서는 동독의 엔다 선수가 독주하였다. 복싱에서는 쿠바의 스테벤손이 KO의 연속으로 헤비급 최초의 2연패를 하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대망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레슬링에서 양정모(梁正模) 선수가 올림픽대회 참가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감격을 연출해 내어 국민의 숙원을 풀어 주었다. 이 대회에는 임원 22명과 선수 50명(남자 38, 여자 12)이 참가하여 레슬링에서 금메달 1개, 동메달 1개, 유도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 단체경기인 여자배구에서 처음으로 동메달을 획득하는 등 참가 종목 중 복싱과 사격에서만 메달이 없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것은 <소수 정예선수 참가>를 택한 성과이기도 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47 ② 동독 40 ③ 미국 34.

    (19) 제22회 대회(1980, 모스크바)

    개회식 7월 19일∼폐회식 8월 3일. 참가국은 81, 선수수 5923. 사회주의국가에서의 최초의 올림픽 대회였으므로 참가국·참가인원이 사상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서독·일본 등의 보이콧이 있었기 때문에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신흥국의 참가가 두드러진 대회였다. 한국도 이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 대회는 시설·운영면에서 사회주의국가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소련이 위신을 걸고 준비한 것이었으므로 훌륭한 것이었으나,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어린이와 학생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회 관계자와 여행자만이 눈에 띄어 시민과 선수가 어울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었던 올림픽 풍경이었다. 또한 주요국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세계신기록 39, 올림픽신기록 95개라는 숫자는 지난 대회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소련과 동독의 메달 경쟁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국이 불참한 수영의 경우, 남자 1500m 자유형에서 사상 최초로 14분대의 세계신기록을 세운 사르니코프가 이 대회 최대의 영웅이었다. 폐회식 때 마스코트인 곰 <미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승수 ① 소련 80 ② 동독 47 ③ 이탈리아·불가리아·캐나다·쿠바 각 8.

    (20) 제23회 대회(1984, 로스앤젤레스)

    개회식 7월 28일∼폐회식 8월 12일. 참가국 140, 선수수 7055.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개최는 52년 만에 2번째이다. 개회 직전 5월 8일에 소련이 선수의 안전 확보를 이유로 불참을 표명하였다. 동독·폴란드 등의 동유럽국가와 쿠바·북한 등의 14개국도 참가를 취소함으로써 80년의 모스크바대회에 이어 이른바 절름발이의 반쪽 대회가 되었다. 그러나 참가국 및 참가 선수수로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였다. 메달의 획득수는 주최국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루마니아·서독을 크게 앞질렀다. 그리고 처음으로 참가한 중국이 금메달 15개를 포함하여 합계 52개를 획득하는 활약을 보였다. 미국의 K. 루이스가 육상 100m·200m·멀리뛰기·400m릴레이의 4종목에서 4관왕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여자마라톤에서는 미국의 27세 주부인 J. 베노이트가 우승하였고, 스위스의 안데르센은 긴 레이스로 체력이 쇠진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완주하여 관중으로부터 큰 성원과 박수를 받았다. 한국은 77명의 임원과 230명(남자 138, 여자 92)의 선수가 레슬링·유도·복싱·농구·핸드볼·육상·사격·역도·수영·조정·펜싱·사이클·체조·근대 5 종·요트·카누·승마·배구·테니스·야구에 참가하여, 레슬링의 김원기(金元基)·유인탁(柳寅卓), 유도의 하형주(河亨柱)·안병근(安柄根), 복싱의 신준섭(申俊燮), 양궁의 서향순(徐香順)이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은메달 6개(레슬링 1, 유도 2, 복싱 1, 농구·핸드볼)와 동메달 7개를 획득함으로써 참가국 140개국 중 10위가 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 도약하였다. 이 대회는 세금을 사용하지 않은 이른바 민영대회로서 총액 5억 달러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다. 그 특색은 52년 전의 콜로세움 등 기존 시설의 이용, 스폰서·서플라이어의 협찬금, 자원봉사자의 대동원에 의한 인건비의 절약 등으로, 1억 5000만 달러의 흑자 결산이 되었다. 개회식에는 하늘을 나는 인간과 할리우드쇼, 폐회식에는 UFO와 <우주인>이 나타나는 등 관중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텔레비전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화려한 연출로 스포츠와 축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 대회였다. 올림픽은 종목·인원·시설의 확대로 거대화함에 따라 안전확보 등을 위한 경비가 막대해짐으로써 도시나 국가의 부담 한도를 넘기 시작하였고, 경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업주의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83 ② 루마니아 20 ③ 서독 17.

    (21) 제24회 대회(1988, 서울)

    개회식 9월 17일∼폐회식 10월 2일. 참가국 160, 선수수 9417.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IOC 총회는 제 2 4회 올림픽대회를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은 체육관계인사를 중심으로 경제계 유력인사, 정부관계인사, 언론인 등 107명의 대규모 올림픽 유치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치열한 경합을 벌인 일본의 나고야[名古屋]를 52:27로 누르고 올림픽대회 유치에 성공하였다.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 올림픽대회인 서울올림픽대회의 경기종목은 정식종목 23(육상·양궁·농구·복싱·카누·사이클·승마·펜싱·축구·체조·핸드볼·하키·유도·근대 5 종·조정·사격·수영·탁구·테니스·배구·역도·레슬링·요트)에 시범종목 2개(야구·태권도), 전시종목 2개(배드민턴·볼링)였다. 이 대회에서 모두 33개의 세계신기록이 수립되었는데, 터키의 역도선수 나임 슐레이마눌루는 한자리에서 모두 6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같은 역도종목에서 소련의 유리 자하레비치가 3개, 불가리아의 세브달린 마라노프도 2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였다. 육상에서는 캐나다의 B. 존슨이 약물 복용을 하지 않았더라면 육상 100m트랙경기에서 세운 9초 79라는 기록이 이 대회를 빛내줄 화려한 세계신기록이 될 뻔했지만, IOC에서 복용을 금지한 약물(아나볼릭스테로이드)을 먹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므로 육상경기에서는 미국의 F.G. 조이너가 여자 200m에서 세운 세계신기록(21초 34)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참가국 160개국 중 종합순위 4위를 차지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양궁의 김수녕(金水寧)이 여자개인전과 여자단체전에서 1위를 하여 최초의 2관왕이 되었고, 단체구기종목에서는 최초로 여자 핸드볼팀이 우승하여 값진 금메달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개회식과 폐회식도 여느 대회 못지 않게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대회의 엠블렘은 한민족 전래의 문양인 3태극에서 착상한 것으로, 3태극을 원심운동과 구심운동의 2가지 형태로 형상화하였는데, 구심은 온세계인이 서울에 모이는 세계적인 <화합>을 나타내고, 원심은 인류의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향한 <전진>을 상징하였다. 마스코트인 <호돌이>는 전통적으로 한민족에게 친근감을 주고 위엄과 용맹을 갖춘 호랑이를 아기호랑이로 단순·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이 대회는 스포츠행사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고, 동서의 이념분쟁과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키면서 세계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킨 대회로 평가되었다. 또 자원봉사자 2만 7221명의 활동도 대회의 성공적 거행의 밑거름이 되었다. 우승수 ① 소련 55 ② 동독 37 ③ 미국 36.

    (22) 제25회 대회(1992, 바르셀로나)

    개회식 7월 25일∼폐회식 8월 9일. 참가국 172, 선수수 1만 5000. 에스파냐로부터 카탈루냐 분리·독립요구와 바스크분리주의자(ETA)의 테러위협 등으로 위험이 예상됐으나 별다른 문제없이 치러졌다. 1972년 뮌헨대회 이후 처음 서유럽에서 개최된 대회였으며,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올림픽에 불참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인·백인이 한데 어울린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또한 80년 모스크바대회 이후 올림픽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쿠바와 북한 등이 모두 참가했고 보스니아공화국 팀도 유엔의 호송으로 무사히 도착해 처음으로 보이콧이 없는 올림픽을 기록해 동서냉전의 해소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했다. 이 대회는 경기종목면에서도 최대 규모인 25개 정식종목과 3개 시범종목으로 <영원한 친구들>이라는 슬로건 아래 모두 257개의 메달을 놓고 조국과 개인의 명예를 건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몬주익언덕 주경기장에서 3시간 동안 펼쳐진 개막식은 F. 도밍고, J. 카레라스 등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격조높은 음악과, 에스파냐의 옛 영화를 재현하면서도 카탈루냐 고유의 문화와 독립의지를 표출한 무용으로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다짐했다. 경기면에서도 독립국가연합(CIS)의 체조스타 V. 셰르보가 안마·링·뜀틀·평행봉·개인종합 등 5개 종목을 휩쓸고 남자단체전에서 2연패를 하는 데 크게 기여해 체조사상 최초로 금메달 6관왕에 올랐다. Y. 사도비도 단거리·중거리를 동시에 제패해 수영 3 관왕이 되었다. 또한 미국의 육상스타 K. 영이 남자 400m허들에서 9년 만에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모두 21개 세계신기록이 나와 대회를 빛냈다. 헝가리의 수영선수 T. 다르니는 왼쪽 눈의 실명이라는 불운 속에서도 올림픽 2관왕 2연패를 이룩하였고, 미국의 G. 디버스도 2개 발가락을 절단하는 역경을 딛고 여자 1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장대높이뛰기 부문에서 세계신기록을 30차례나 경신해 <인간새(鳥人)>로 불리는 S. 부브카(CIS)가 최하위에 머물러 큰 이변을 일으켰다. 한국은 야구와 농구를 제외한 전 종목과 시범종목인 태권도 등 24개종목에 걸쳐 임원 97명, 선수 247명이 참가했다. 사격에서 여갑순(呂甲順)이 바르셀로나 금메달 1호로 우승과녁을 명중시킨 데 이어 이은철(李銀徹)이 남자소구경복사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초반에 2개 금메달을 따냈다. 마라톤에서 황영조(黃永祚)는 2시간 13분 23초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해 손기정(孫基禎)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베를린올림픽 이래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제패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여자핸드볼팀은 서울올림픽에 이어 한국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이루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5개, 동메달 12개로 종합 7위의 성적을 올렸다. 우승수 ① CIS 45 ② 미국 37 ④ 독일 33.

    (23) 제26회 대회(1996, 애틀랜타)

    개회식 7월 19일∼폐회식 8월 4일. 참가국 197, 선수수 1만 700. 사상 최초로 IOC 전 회원국이 참가한 대회였으나 불합리한 수송체계에서 비롯된 교통혼란과 잦은 컴퓨터 고장은 지나친 상업주의와 더불어 참가국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특히 7월 28일 발생한 폭파사건으로 현장에서 2명이 사망해 <안전 올림픽>이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참가선수들이 불태운 스포츠를 향한 열정만은 올림픽의 순수한 정신에 어긋나지 않았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등에 업은 미국이 육상과 수영에서 강세를 보이며 종합 1위를 차지했고, 러시아·독일·중국이 그 뒤를 이었으며, 2000년 올림픽대회 개최국인 오스트레일리아가 7위로 부상해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대회에서는 특히 10위권 내의 다툼이 치열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자력으로 10위권을 지키며 저력을 과시했고, 한국은 금메달 7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5개 등 총 메달수 27개로 10위를 차지해 올림픽대회 4회 연속 10위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최소한 1개 이상의 메달을 따낸 나라는 79개국에 이르렀고 이중 53개국은 1개 이상의 금메달(5개국은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7년 중국에 환수되는 홍콩은 올림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금메달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 대회에는 또 여자축구를 비롯하며 비치발리볼, 경량급 조정경기, 여자 소프트볼, 산악자전거 경기 등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치러졌다. 애틀랜타 올림픽대회 역시 잊지 못할 스타들을 배출해냈다. 육상에서 9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미국의 K. 루이스, 올림픽대회에 연속 4회 출전해서 4번째 금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조정선수 S. 레드그레이브, 1992년 올림픽대회 다이빙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애틀랜타 올림픽대회에서 스프링보드와 플랫폼 양 종목을 석권한 중국의 푸밍샤 등이 그들이다. 미국의 육상선수 M. 존슨은 200m와 400m 동시 우승으로 가장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여자 200m와 400m를 석권한 프랑스의 마리 M.G. 페레크와 800m, 1500m에서 우승한 러시아의 S. 마스테르코바와 견줄 만한 대기록이었다. 러시아의 A. 네모프는 체조에서 금메달 6개를 따내 대회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아일랜드에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바친 여자수영선수 M. 스미스는 대회 내내 약물복용 여부로 언론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우승수 ① 미국 43 ② 러시아 25 ③ 독일 18.


    5 동계올림픽
    겨울철 경기가 올림픽대회에 첨가된 것은 제 4 회 대회(1908, 런던)의 피겨 스케이팅이 처음이었다. 이때 제정 러시아가 본국으로서는 최대의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 후의 제7회 대회(1920, 안트베르펜)에서는 피겨 스케이팅 이외에 아이스하키가 더해졌다. 이듬해인 1921년 IOC 회의에서 본격적인 동계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북유럽 3개국이 반대하였다. 동계대회는 북유럽과 같은 지리적 이점이 있는 곳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이미 그들이 하고 있던 대회, 특히 노르웨이의 홀멘코렌 대회로 충분하다는 것이 속셈이었다. 그러나 결국 IOC의 공식 승인이 나 시험적으로 프랑스에서 열기로 하였다.

    (1) 제 1 회 대회(1924, 샤모니 몽블랑)

    개회식 1월 25일∼폐회식 2월 4일. 참가국 16, 선수수 294. 알프스 등산의 기지였던 프랑스의 변경 샤모니는 당시 벽촌이었으나, 온 마을이 준비에 나서, 선진 스포츠도시에 대해서도 참고로 조사하는 등 훌륭한 대회를 개최하였다. 스포츠의 자연조건이 좋아, 반대하던 북유럽 3국도 참가하여 선진국다운 멋진 경기를 보여주었다. 같은 해에 국제스키연맹(FIS)이 결성되었다. 2년 뒤의 IOC 총회에서는 이 대회를 제 1 회 동계올림픽대회로 호칭하게 되었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4, 핀란드 4 ② 오스트리아 2.

    (2) 제 2 회 대회(1928, 장크트모리츠)

    개회식 2월 11일∼폐회식 2월 19일. 참가국 25, 선수수 464. 하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한 네덜란드는 평탄한 국토에다 동계경기장도 없었으므로 스위스에서 열었다. 경기 중 기온이 25℃ 정도까지 올라 1만m경기는 중지되었다. 북유럽 3국의 독무대였다. 이후 제 1 0회 대회까지 동계올림픽은 기후로 골치를 앓았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6 ② 핀란드·스웨덴·미국 각 2.

    (3) 제 3 회 대회(1932, 레이크플래시드)

    개회식 2월 4일∼폐회식 2월 13일. 참가국 17, 선수 수 252. 대회장은 뉴욕주(州)의 교통이 불편한 벽촌이었는데, 미국이 거액을 투자하여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50년대의 이상난동(異常暖冬) 때문에 스키 코스 등은 레이스 전에 80㎞나 떨어진 곳으로 변경, 캐나다로부터 눈을 실어오기까지 했다. 스케이트는 미국 규칙의 오픈 레이스제로 실시했으므로 유럽 선수와의 사이에서 큰 마찰을 빚었다. 그 때문에 스피드 스케이팅은 미국이 대승했으나, 스키는 정예주의로 참가한 북유럽이 우승을 거두었다. 우승수 ① 미국 6 ② 노르웨이 3 ③ 핀란드·스웨덴·오스트리아·프랑스 각 1.

    (4) 제 4 회 대회(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개회식 2월 6일∼폐회식 2월 16일. 참가국 28, 선수수 669. 이 대회 때도 기온이 높았으나, 스키장·스케이트장 모두 나치스 독일의 위력으로 커다란 가설 스탠드를 만들었다. 대회장 주변에까지 반(反)유대인 슬로건이 붙어 있었으므로 IOC 회장 라투르가 히틀러에게 엄중 항의하여 철거시킨 일도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주요 종목으로 되어 있는 스키의 알파인경기가 시작된 것도 이 대회 때의 일이다. 여자 종목에서도 처음으로 알파인 1종목이 실시되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 소니아 헤니는 제 1 회 대회에 13세로 처음 참가한 뒤, 이 대회까지 3회 우승하여 은반의 여왕으로 불렸다. 이 대회에는 한국인 김정연(金正淵)·이성덕(李聖德)·장우식(張佑植) 세 사람이 일본 선수단 34명에 끼어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7 ② 독일 3 ③ 스웨덴 2.

    (5) 제 5 회 대회(1948, 장크트모리츠)

    개회식 1월 30일∼폐회식 2월 8일. 참가국 28, 선수수 878. 제 2 차세계대전 후의 첫 대회로 독일·일본은 초대받지 못하였다. 또한 날씨도 경기하기에 좋지 않았다. 아이스하키에서 미국의 두 팀이 참가하는 진기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 대회에서였다. 한 팀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에 가입해 있던 미국의 아마추어하키협회 추천팀이었는데, 미국 NOC가 인정하지 않아 독자적인 팀을 편성했지만 국제연맹이 승인하지 않았다. 입장료 수입을 노리고 두 팀을 인정한 조직위원회가 비난을 받았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은 제명되었다. 곧 연맹측이 IOC에 사과함으로써 아이스하키는 정식경기로 추인되었다. 이 대회부터 한국팀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하였다(임원 2, 선수 3). 우승수 ① 스웨덴 4, 노르웨이 4 ② 스위스 3.

    (6) 제6회 대회(1952, 오슬로)

    개회식 2월 14일∼폐회식 2월 25일. 참가국 30, 선수수 694.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옛이름 크리스티아니아가 스키의 기술·명칭에 있듯이, 처음으로 동계경기의 발상지에서 개최되었다. 근대스키 창시자의 한 사람인 S. 노르헤임(1825∼97)의 출생지 몰게다르에서 오슬로까지 동계대회 최초의 성화봉송이 거행되었다. 수도를 개최지로 한 것은 동계대회로서는 처음이다. 독일과 일본이 다시 초대되었다. 역시 북유럽 3국이 명예를 걸고 활약하였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실내 링크를 사용한 것도 처음이다. 한국은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7 ② 미국 4 ③ 핀란드 3, 독일 3.

    (7) 제7회 대회(1956, 콜티나단페초)

    개회식 1월 26일∼폐회식 2월 5일. 참가국 32, 선수수 820. 이탈리아 북부의 동계경기 중심지였으므로 조건이 양호하였다. 소련이 처음으로 참가하여 각 경기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오스트리아의 A. 자일러가 스키경기에서 알파인 3관왕이 되었다. 점프경기에서는 핀란드 선수가 손을 허리에 대는 드롭 스타일로 금·은메달을 독점하였다. 종래는 양손을 머리의 앞쪽으로 뻗어서 점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은 임원 3명과 선수 4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6 ② 오스트리아 11, 스웨덴 11.

    (8) 제 8 회 대회(1960, 스쿼밸리)

    개회식 2월 18일∼폐회식 2월 28일. 참가국 30, 선수수 666. 미국의 한 기업가가 눈사태로 유명한 <죽음의 골짜기> 근처에 거액을 들여 시설을 함으로써 개최되었다. 스케이트 링크는 파이핑 링크를 채용하여 대회를 성공시켰다. 경기에서는 소련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다.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이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되었다. 한국은 임원 3명, 선수 7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21 ② 미국 10 ③ 독일 8.

    (9) 제 9 회 대회(1964, 인스브루크)

    개회식 1월 29일∼폐회식 2월 9일. 참가국 36, 선수수 933. 오스트리아가 자랑한 대회장도 대회 전의 심한 눈 부족으로 연습하던 선수 2명이 사고로 죽었다. 소련이 전대회에 이어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다. 한국은 임원 6명, 선수 7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1 ② 오스트리아 4 ③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 각 3.

    (10) 제10회 대회(1968, 그르노블)

    개회식 2월 6일∼폐회식 2월 18일. 참가국 37, 선수수 1293. 프랑스의 오랜 역사와 신흥공업화에 성공한 도시가 대회장이었다. C.A.J.M. 드골 대통령도 큰 힘을 기울였다. 개회식이 경기장이 아닌 큰 가설 스타디움에서 거행되고, 식전음악에 근대음악을 연주하는 등, 연출의 참신함이 돋보였다. 이 대회부터 합동으로 참가했던 독일이 동·서 양국으로 갈라져 참가하였다. 또 성별검사와 도핑테스트도 실시되었다. 입상자가 메이커의 상표를 뚜렷이 알 수 있는 스키를 들고 사진 찰영에 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경기에서 프랑스의 퀴리가 제 7 회 대회의 자일러에 이어 사상 2번째로 스키 알파인 3관왕이 되었다. 한국은 임원 7명과 선수 8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6 ② 소련 5 ③ 프랑스 4, 이탈리아 4.

    (11) 제11회 대회(1972, 삿포로)

    개회식 2월 3일∼폐회식 2월 13일. 참가국 35, 선수수 1128. 1940년에 개최가 내정되었으나, 제 2 차세계대전으로 취소되었던 삿포로가 조건·성적 모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동계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조건인데, 이 대회는 꽤 좋은 기후 속에서 진행되었다. 동계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오스트리아의 슈랑츠가 아마추어 규정 위반으로 출장을 거부당하였다. 또 도핑테스트로 실격한 선수가 나왔으며, 동계경기의 비(非)아마추어화는 IOC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한국은 임원 2명, 선수 5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8 ② 동독·스위스·네덜란드 각 4.

    (12) 제12회 대회(1976, 인스브루크)

    개회식 2월 4일∼폐회식 2월 15일. 참가국 37, 선수수 1261. 당초에는 미국의 덴버로 결정되었으나, 환경파괴의 우려가 있다 하여 시민투표에서 부결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가 대신 대회 개최지가 되었다. 되도록이면 지난 대회의 시설을 이용·개선하여 간소한 대회로 치를 것을 표방하였다. 경기에서는 소련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여 13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동독이 7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우세를 보였다. 한국은 임원·선수 각 3명씩 6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3 ② 동독 7 ③ 미국 3, 노르웨이 3.

    (13) 제13회 대회(1980, 레이크플래시드)

    개회식 2월 13일∼폐회식 2월 24일. 참가국 37, 선수수 1283. 제 3 회 동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미국에서 겨울 스포츠의 메카가 된 레이크플래시드에서 다시 열렸다. 메달경쟁은 예상대로 소련이 우세했으며, 2위는 동독이 차지했다. 개최국인 미국의 E. 하이덴이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5개의 금메달을 휩쓸고, 아이스하키에서 미국이 소련을 누르고 우승하는 등 화제가 많았던 대회였다. 한국은 임원 9명과 선수 10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0 ② 동독 9 ③ 미국 6.

    (14) 제14회 대회(1984, 사라예보)

    개회식 2월 7일∼폐회식 2월 19일. 참가국 49, 선수수 1490. 처음으로 비동맹국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최된 대회였다. 대회 전에는 눈이 적었으나, 대회중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동독이 엥케 등의 활약으로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4종목(500m·1000m·1500m·3000m) 모두에서 금·은메달을 독식하였다. 피겨 스케이팅 페어부문에서는 소련이 6연승을 장식하였으며, 아이스하키에서는 지난 대회에 우승했던 미국이 초반전에 캐나다에게 패배함으로써 소련이 우승하였다. 스키의 노르딕에서는 핀란드의 하말라이넨이 5㎞·10㎞·20㎞의 여자 3종목에서 모두 우승하였다. 한국은 임원 17명에 선수는 15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동독 9 ② 소련 6 ③ 미국·핀란드·스웨덴 각 4.

    (15) 제15회 대회(1988, 캘거리)

    개회식 2월 14일∼폐회식 2월 29일. 참가국 57, 선수수 1759. 10개 경기종목에서 각축을 벌였다. 캘거리 시민 남녀노소가 참가한 개회식·폐회식이 인상적이었다. 아이스하키의 남·북한 대결에서 한국이 북한을 이겼다. 한국은 임원 16명과 선수 30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1 ② 동독 9 ③ 스위스 5.

    (16) 제16회 대회(1992, 알베르빌)

    개회식 2월 9일∼폐회식 2월 24일. 참가국 65, 선수수 2031. 많은 선수들이 참가하였으나, 프랑스 알베르빌경기장의 낡은 시설과 좋지 않은 기후로 진행에 무리가 있었다. 제 5 회 대회부터 참가했으나 메달을 따지 못했던 한국은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2개, 은·동메달 각 1개로 종합성적 세계10위를 차지하였다. 우승수 ① 독일 10 ② 독립국가연합·노르웨이 각 9. 한편, 동계대회는 1992년 제16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하계대회와 2년 간격으로 나뉘어 개최되기 때문에 제17회 대회는 94년(제26회 하계올림픽대회는 96년에 개최)에 개최하게 되었다.

    (17) 제17회 대회(1994, 릴레함메르)

    개회식 2월 13일∼폐회식 3월 1일. 참가국 67, 선수수 3793. 1952년 오슬로대회에 이어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에 강세를 보여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종합 6위에 올랐다. 우승수 ② 노르웨이 10 ③ 독일 9.

     

    올림픽종목은

     

    육상,수영,체도,역도,권투,레슬링,유도,펜싱,사격,양궁,마술(말타면서 요기부리는거 헷갈리지마세요 ㅎ),보트,자전거,요트 가있구요

    선택종목으로는 축구,럭비풋볼,테니스,수구,핸드볼,농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올림픽은 4년마다 열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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